<항목 ID="GC80000844" 유형="일반항목" 레벨="6"> <항목명> <대표항목명><항목연결 항목ID="GC80000844">정유재란 <한글항목명>정유재란 <한자항목명>丁酉再亂 <영문항목명> <공식명칭>The Japanese Iinvasion of Korea in 1597~1598 <중국어항목명 /> <중문항목명> <메타데이터> <이칭별칭>정유란|경장의 역 <키워드>임진왜란|도산성전투|서생포왜성|서생포회담 <대표분야>역사/전통 시대 <대표유형>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표준지역>울산광역시 <표준시대>조선/조선 후기 <분야>역사/전통 시대 <유형>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울산광역시 <시대>조선/조선 후기 <집필자>김강식 <상세정보 type="시간" 유형="발생|시작 시기/일시" 내용="정유재란 발발" 비고="">1597년 1월<시간 식별자="울산:정유재란 발발" /> <상세정보 type="시간" 유형="종결 시기/일시" 내용="정유재란 종결" 비고="">1598년 11월 <상세정보 유형="성격">전쟁 <상세정보 유형="관련 인물/단체"> <인명>도요토미 히데요시|<인명>가토 기요마사 <의견 /> <관련항목 ID="GC80000842">임진왜란<관련항목 ID="GC80000839">서생포왜성강화회담 <본문> <소표제>[정의] <문단> <항목연결 항목ID="GC80000842">임진왜란 중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1597년에 일본군이 다시 <지명>울산을 포함한 <지명>한반도를 침략한 전쟁. <소표제>[역사적 배경] <문단> <항목연결 항목ID="GC80000842">임진왜란 초기에 <지명>한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여 8도를 지배하던 일본군은 전선이 북쪽으로 확대되고, <지명>남해안의 해로가 <인명 검색="0" UCI="G002+AKS-KHF_13C774C21CC2E0B1545X0" 검색어="이순신">이순신(李舜臣) 장군에게 봉쇄되고 의병(義兵)이 각지에서 일어나면서 일본군에 대한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전황의 불리함을 깨닫고 강화회담에 나섰다. <지명>명나라도 1593년 1월의 벽제관전투에서 패한 후 자국의 이해를 우선시하여 종전을 원했으므로, <지명>명과 <지명>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지명>명나라와 <지명>일본은 서로 자국에 유리한 입장에서 강화 교섭을 진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지명>일본이 요구한 ‘<지명>명의 황녀(皇女)를 <지명>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등 7개 조항의 조건이 수용되지 않자, 3년여에 걸친 강화회담은 결렬되었다. 일본군은 1597년 1월 <지명>조선을 침략하여 <지명>조선의 <지명>남해안에 잔류하고 있던 일본군과 합세하여 다시 총공세에 나섰다. 한편 강화회담이 실패하여 <지명>일본이 재침하려 하자, <지명>조선은 청야작전(淸野作戰)에 따라 대비책을 마련하여 <지명>경상도의 관민을 <지명>창녕의 <지명>화왕산성 등에 집결시켜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또 <기관>비변사(備邊司)는 12월에 일본군이 <지명>한성으로 북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였다. <소표제>[경과] <문단> <항목연결 항목ID="GC80000844">정유재란의 목적은 <지명>명나라의 정복이 아니라 <지명>조선의 남쪽을 할양하는 데 있었다. 일본군은 1597년 1월 <지명>조선에 상륙하여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지명>경상·<지명>전라·<지명>충청도를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재침에 앞서 <지명>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인명 검색="0" UCI="G002+AKS-KHF_13C774C21CC2E0B1545X0" 검색어="이순신">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꾸몄고, 1597년 2월 <인명 검색="0" UCI="G002+AKS-KHF_12C6D0ADE0FFFFB1540X0" 검색어="원균">원균(元均)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4년 9월 모든 병력을 <지명>요동으로 철수하였던 <지명>명나라는 <인명>형개(邢玠)를 경략(經略)으로 하여 동정군을 재편성하여 1597년 5월에 다시 출병하였다. <문단>일본군은 보급로의 장악을 위해 <지명>경상도를 지나 <지명>전라도를 점령한 후 <지명>한성을 공격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지명>일본 우군의 <인명>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지명 검색="1" 검색어="서생포">울산 서생포를 출발하여 <지명>낙동강을 건너 <지명>합천으로 진출하였으며, 8월에 북쪽의 <지명>황석산성을 함락시키고, <지명>육십령을 넘어 <지명>전라도로 침입하였다. 한편 <지명>남해안을 따라 진출한 <인명>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좌군도 <지명>사천과 <지명>하동으로 진출하여 8월 <지명>구례를 거쳐 <지명>남원성에서 우군과 합세하여 <지명>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지명>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군과 대치하였으나 <지명>명나라 기병(騎兵)에 패하여 남하하였다. 일본군의 우군은 <지명>경상도로, 좌군은 <지명>전라도로 남하하여 일본군이 수세에 놓였다. <문단> <지명>울산에는 <인명>가토 기요마사의 군사가 10월 8일 <지명 검색="1" 검색어="서생포왜성">서생포왜성에 들어가 주둔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지명>남해안으로 후퇴하여 10월부터 왜성을 쌓고 장기 주둔을 꾀하였는데, <지명>울산에서는 <인명>아사노 쵸케이[淺野長慶]가 <지명 검색="1" 검색어="도산성">도산성(島山城)을 쌓았다. 1597년 12월 <지명>조선과 <지명>명 연합군이 <지명 검색="1" 검색어="도산성">도산성을 대규모로 공격하여 <지명>일본 우군을 격멸시키려 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일본군은 군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군분투하다 지원군의 도움으로 겨우 구출되었다. 이것이 1차 <항목연결 항목ID="GC80000837">도산성전투이다. 1598년 9월에 <지명>조선과 <지명>명의 연합군은 서로군(西路軍), 중로군(中路軍), 동로군(東路軍)을 편성하고, 수군이 받치는 형태의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개시하였다. 이 작전은 <지명>순천왜교성[<인명>고니시 유기나가 군], <지명>사천왜성[<인명>시마즈 요시히로 군], <지명 검색="1" 검색어="도산성">울산도산성[<인명>가토 기요마사 군]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세 전투 모두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지명>조선과 <지명>명의 연합군은 사로병진작전에 따라 9월 초에 동로군이 <지명 검색="1" 검색어="도산성">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저항과 구원병이 올 것이라는 소문 등으로 실패하였다. 이것이 2차 <항목연결 항목ID="GC80000837">도산성전투이다. <소표제>[결과] <문단>1598년 8월에 <지명>조선 침략을 주도했던 <인명>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으로 죽자,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라는 유언에 따라 철수하기 시작하여 11월 <인명 검색="0" UCI="G002+AKS-KHF_13C774C21CC2E0B1545X0" 검색어="이순신">이순신의 노량해전을 끝으로 <항목연결 항목ID="GC80000842">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지명>울산에 주둔하던 <인명>가토 기요마사 군은 10월 본국으로부터 철군 명령을 받고, 11월 성을 불태우고 <지명>부산으로 철수하였다. 현재 <지명>울산에는 <지명 검색="1" 검색어="도산성">울산 도산성[<지명>학성]과 <지명 검색="1" 검색어="서생포왜성">서생포왜성이 남아 있다. <문단> <항목연결 항목ID="GC80000844">정유재란은 <항목연결 항목ID="GC80000842">임진왜란 때보다 전쟁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잔악 행위가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일본군은 대규모 살육을 자행하였으며,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명>조선과 명군의 코나 귀를 베어 전리품으로 <지명>일본에 보냈다. 남녀노소를 포로로 잡아가 노비로 사역하거나 서양에서 온 노예상에게 팔아 넘겼다. 또한 일본군은 포로로 많은 기술자를 데리고 가서 본업에 종사시켰는데, <지명>규슈[九州] 지역의 다이묘[大名]들은 도공(陶工)을 잡아가 도자기를 굽게 하였다. 이때 <지명>울산 인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잡혀 나갔다. <소표제>[의의와 평가] <문단> <항목연결 항목ID="GC80000844">정유재란은 전쟁 기간은 짧았으나 동양 3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지명>울산 지역은 일본군의 장기간 주둔과 두 차례의 <항목연결 항목ID="GC80000837">도산성전투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지명>울산 지역민은 일본군에 의해 가혹한 경제적 수탈, 부역 노동의 징발 등 무거운 부담이 가중되었지만, 관군과 의병에 참여하여 장기간 항전하였다. 또한 전쟁 이후 <지명>울산 지역에는 성리학 지배 체재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대책과 제도가 마련되었는데, 이처럼 <항목연결 항목ID="GC80000844">정유재란은 <지명>울산 지역을 여러 방면에서 변화시킬 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문헌> <저자>이형석, <서명 검색어="임진전란사">『임진전란사』(<출판사항>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67) <문헌> <서명 검색어="임진왜란사">『임진왜란사』(<출판사항>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문헌> <저자>이유수, <서명 검색어="울산임란사">『울산 임란사』(<출판사항>울산문화원, 1999) <문헌> <서명 검색어="울산임란사 재조명">『울산임란사 재조명』(<출판사항>울산충의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