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GC80002473" 유형="기획항목" 레벨="3"> <항목명> <대표항목명>같은 회사 사람들이 같이 모여 살던 시절이 있었다 <한글항목명>같은 회사 사람들이 같이 모여 살던 시절이 있었다 <한자항목명 /> <영문항목명> <공식명칭 /> <음역 /> <중국어항목명 /> <중문항목명> <메타데이터> <이칭별칭 /> <키워드>사택 단지|공업 단지|사택|근로자 사택|한국비료 사택|이주 근로자 <대표분야>생활·민속/생활 <대표유형>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표준지역>울산광역시 <표준시대>현대 <분야>생활·민속/생활 <유형>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울산광역시 <시대>현대/현대 <집필자>강혜경 <의견 /> <관련항목 ID="GC80001101">노동자 집단 주거지<관련항목 ID="GC80002372">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관련항목 ID="GC80050987">온산국가산업단지<관련항목 ID="GC80010269">삼성정밀화학 사택<관련항목 ID="GC80020156">한화케미칼 무거동 사택<관련항목 ID="GC80020219">동부한농화학 사택<관련항목 ID="GC80020220">한국석유공업 사택<관련항목 ID="GC80020233">효성 사택<관련항목 ID="GC80030162">현대중공업 사택<관련항목 ID="GC80040215">현대자동차 사택<관련항목 ID="GC80000271">경제 산업 정책 <본문> <소표제>[정의] <문단> <지명>울산 지역의 사택에서 거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소표제>[개설] <문단> <지명>울산광역시에는 1960년대부터 개발된 <지명 검색="1" 검색어="미포국가산업단지">미포국가산업단지와 1970년대에 개발된 <지명 검색="1" 검색어="온산국가산업단지">온산국가산업단지라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산업 단지가 있기 때문에 타 지역에 비해 유독 기업체의 사택 단지가 많다. 본문에서는 이들 기업체의 사택에서 영위되는 일상생활을 살펴보기로 한다. <소표제 class="new">[사택 생활문화] <문단> <지명>울산은 1962년 군사 정부에 의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핵심 사업지인 ‘특정 공업 지구’로 결정됐다. 이 계획에 따라 1963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장이 건설되면서 많은 사람이 대거 유입됐다. 기업체의 정규 직원에게는 회사가 대규모 사택 단지를 조성해서 집을 제공했다. 반면 일용직 노동자나 공장 건설 인부들에게는 <지명>울산 토박이들이 마당 한쪽이나 주거지 인근 논밭에 방 한 칸, 부엌 하나로 이루어진 긴 장옥(長屋)을 지어 세를 놓았다. 평온하던 작은 고장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문단>1960년대 <지명>울산은 공장과 사택 건설로 날마다 모습이 바뀌어 갔다. 낯선 땅 <지명>울산에 정착해 <지명>울산 시민으로 반세기 동안 살면서, 각 기업의 임직원들은 사택 생활문화라는 새로운 거주 영역을 구축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지명>울산의 사택 생활문화는 국가 산업 단지 <지명>울산의 또 다른 면모이기도 했다. 현재는 이전보다 사택 수도 현저히 줄었고, 사택 생활문화 또한 많이 변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독특한 사택 생활문화가 사라지기 전에 이를 기록해서 남겨 두려는 조사들이 있었는데, 이 글은 한 면접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조사는 <지명>울산 지역의 여러 사택 단지 중 가장 규모가 컸고 또 개발 초기에 지은 <지명>구 한국비료 사택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2016년 11월 20일부터 그해 12월 23일까지 사택에 살았던 적이 있는 사람 16명을 면접하였는데, 여기서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 <지명>구 한국비료 사택은 현재의 <지명 검색="1" 검색어="복산동">울산광역시 중구 복산동에 위치했으며, 현재는 <지명>래미안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소표제 class="new">[1937년생 윤 씨의 사택 생활] <문단>1937년생인 윤○○ 씨는 1966년 <기관>충주비료에서 <기관 검색="1" 검색어="한국비료">한국비료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지명>울산으로 이주했다. <지명>한국비료 사택 392호에 살다가 사택이 단독 주택에서 아파트로 바뀌면서 라동 405호로 옮겨 살았다. 부인인 조○○ 씨는 1943년생으로 친정이 <지명>안동이고, <인명>윤 씨 역시 <지명>대구 출신이어서 <지명>울산은 매우 낯설었다. 그래서 더욱 사택의 이웃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문단> <지명>한국비료 사택에서 시장을 보러 가려면 회사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부인 <인명>조씨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이웃끼리 함께 시장을 보러 다녔다. 회사 버스에서 내려 삼삼오오 <지명 검색="1" 검색어="옥교동">옥교동 <지명 검색="1" 검색어="울산중앙시장">중앙시장으로, <지명 검색="1" 검색어="울산역전시장">역전시장으로 다니면서 찬거리와 생필품을 구매했다. 이때는 100원으로 장을 보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어쩌다가 주머니에 500원을 넣고 장을 보는 날이면 남부러울 게 없는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장바구니 가득 장을 보고 나서는 다시 회사 버스를 타고 사택으로 돌아왔다. <문단>시장에 가지 않는 날은 사택 안에 있는 공중목욕탕에 다 같이 몰려가서 서로 등을 밀어 주며 목욕을 하기도 하고 탁구장에서 탁구를 즐기기도 했다. 또 테니스 코트가 있어 테니스를 치기도 하면서 이웃과의 교류를 돈독히 했다. 사택에서 여가 생활 중 특히 인기가 있었던 것은 에어로빅 교실이었다. 강사가 와서 친절히 가르쳐 줬는데 수강료도 무료여서 다들 즐겁게 춤을 배웠다. 에어로빅을 신나게 추고 나서는 땀을 식히기 위해 분수대가 설치된 사택 마당에서 수다를 떨기도 했다. 또 합창단을 만들어 노래 연습도 했는데 <지명>진주에서 개최된 합창 경연 대회에 나가 1등을 하기도 했다. <문단>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이웃 간에 서로 품앗이로 김장을 했다. 한 번 하면 2주 내내 김장을 했는데, 배추를 절이는 소금물은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게 아니라 이웃으로, 또 이웃으로 넘겨 가면서 사용했다. 김장철이면 내내 동네잔치가 열리듯 시끌벅적했다. 또 사택 부인회 회원들이 회사에 들어가서 회사 김장을 같이하기도 했다. 장 담그기도 마찬가지였다. 이웃끼리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띄워서 장을 담글 때까지 사택 안에는 특유의 큼큼한 냄새와 독을 씻고 말리느라 부산한 기운이 늘 함께했다. 이렇게 함께 모여 김장을 하고 장을 담그면서 하루 종일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나둘 집으로 돌아오고 남편이 퇴근할 시간이 되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문단>겨울이 되면 겨우살이 준비로 분주했다. 초창기 사택은 연탄을 사용했는데, 보너스가 들어오면 먼저 연탄부터 사 넣었다. 연탄 1,000장을 들여놓고 쌀도 한 가마니 사서 쌀독을 가득 채운 날이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소표제 class="new">[1939년생 김 씨의 사택 생활] <문단> <기관 검색="1" 검색어="한국비료">한국비료 공무정비과에서 근무하면서 일명 ‘기계대장’이라고 불렸던 김○○ 씨는 첫 월급이 9,000원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39년생으로 <지명>김해시 진영 출신이다. 1966년 6월 14일 입사해 회사 안 숙소에서 생활했던 터라 월급은 고스란히 저축할 수 있었다. 회사 안의 숙소는 군대 막사처럼 생겼는데 수십 명이 같이 잠을 자는 환경이었다. 결혼을 한 후 사택에 거주하게 되면서 열악했던 독신자 숙소도 추억으로 남게 됐다. <문단>사택 바깥은 농사를 짓는 한편 도로를 새로 개설하고 집도 새로 들어서는 등 매우 분주했지만, 담장과 경비가 지켜 주는 사택 안은 늘 평화로웠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남편들이 출근을 하고 나면 사택 부인들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취미 생활을 즐기고 집안 대소사에 상부상조하기도 했으며, 김장을 같이하기도 하면서 사택 공동체 생활을 활기차게 했다. 이런 관계는 회사를 퇴직하고 사택을 나온 후에도 서로 가까이 살면서 지금까지 이어 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추임회’라는 모임이다. 사택에서 살 때 에어로빅을 함께 배운 사람들의 모임으로, 지금은 매주 금요일 오전 11시에 모여 한국 무용을 배우고 있다. 한바탕 춤을 추고 나서 담소를 나누고 또 같이 점심도 먹으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있는데 그 세월이 50년이다. 오랜 시간을 같이하면서 쌓아 온 이웃의 정은 사택이라는 매개체가 가져다 준 소중한 인연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소표제 class="new">[1939년생 장 씨의 사택 생활] <문단>2016년 11월 30일 <지명 검색="1" 검색어="성남동">울산광역시 중구 성남동의 한 찻집에서 장○○ 씨를 만났다. 그녀는 1968년부터 1988년까지 20여 년을 사택에서 생활했다. 1939년생인 그녀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으로 20년 동안의 사택 생활 이모저모를 들려줬다. 그녀는 1967년 11월 남편을 따라 <지명>울산으로 왔다. 당시 그녀는 고향 <지명>광주 시내에서 미장원을 운영하다가 <지명>울산으로 왔는데 모든 것이 낯설었다. 처음 6개월은 <지명 검색="1" 검색어="교동">중구 교동의 초가집에서 살다가 나중에 회사의 신(新)사택 402호를 배정받아 이사했다. 이미 구(舊)사택이 지어져 있었고 <인명>장 씨가 이사할 무렵 신사택이 건설됐다. 신사택은 산을 깎아서 지었기 때문에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됐고, 도마뱀도 많아서 무척 불편했다고 한다. <문단>그렇지만 집은 정말 좋았다고 하는데, 방 3개에 주방과 거실, 화장실과 세면장이 따로 있었다. 부엌은 연탄을 사용했고, 장독대는 마당에 있었다. 넓은 마당에서는 상추나 고추, 오이 등등을 직접 길러 먹었다. 아이 둘을 키웠는데, 주로 앞마당과 사택 단지 안의 넓은 도로나 공터 등 푸른 초원에서 맘껏 뛰놀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키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고 한다. 생활용품 구매는 주로 <지명 검색="1" 검색어="옥교동">옥교동에 있는 <지명 검색="1" 검색어="울산중앙시장">중앙시장에서 했는데 회사 버스를 타고 다녔다. 큰 도로에 내려 주면 시장까지 조금 걸어갔는데, 이웃 서너 명이 함께 모여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다녔다. <문단>사택 생활에서 가장 불편한 점은 교통 문제였다. 사택이 도심에서 멀리 섬처럼 위치하고 있어 시내를 오가는 것이 불편했다. 이동 수단은 회사 버스가 유일했다. 또 다른 문제는 아이들 학교 문제였다. 처음에는 사택 옆 <기관 검색="1" 검색어="학성초등학교">학성초등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사택 부인들의 치맛바람이 심해 일부러 먼 <기관 검색="1" 검색어="울산초등학교">울산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아이들은 논두렁을 따라 한 시간을 걸어 통학했다. <문단>사택에서 친하게 지낸 이웃은 일곱 집 정도 됐다. 같이 김장도 하고 장도 담그고 설 때면 강정을 만들기도 했다. 봄가을에는 음식을 장만해 트럭에 싣고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 다니기도 했다. 언젠가 일곱 집이 <지명>청송에 놀러 가 야영을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또 회사에서 <지명>경주로 놀러 갔을 때는 부인들끼리 <항목연결 항목ID="GC80001921">닭싸움을 했는데, 신사택 대표로 나가 덩치가 두 배나 더 큰 구사택 대표를 이겨 즐거워했던 기억도 있다. 당시의 이웃들과는 작년까지 1년에 두 번씩 친목계를 했었는데 이제는 그만뒀고, 지금은 친한 사람들과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 <문단>그녀는 지금은 노인 일자리 센터에서 초등학교 급식 배식 일을 알선 받아 하고 있고, 또 장애인 센터에서의 배식 활동과 유치원 아이들 돌보미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을 좋아하는데, 사택에 살면서 이웃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이 외향적인 성향을 더 키운 것 같아 참 좋은 경험이었다고 전한다. <소표제 class="new">[1967년생 장 씨의 사택 생활] <문단>1967년생인 장○○ 씨는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76년 <지명>한국비료 사택으로 이사 가서, 스무여덟 살이 되던 해인 1994년까지 살았다. 그 전에는 여섯 식구가 <지명 검색="1" 검색어="야음동">울산 남구 야음동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단독 주택에 세 들어 살았다. 새로 이사 간 사택은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무척 넓었다. 우선 방도 3개인 데다 각 가구마다 전용으로 사용하는 마당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화장실이 수세식이어서 너무 놀라고 신기했다. 마당은 엄마가 텃밭을 일구어 채소를 가꾸었기 때문에 사택 단지 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단지가 매우 넓고 울타리가 쳐져 있어 안전했기 때문에 해가 지고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밖에서 놀았다. 그때는 정말 즐거웠다. <문단>하루는 열쇠를 두고 학교에 갔는데, 집에 돌아오니 문이 잠겨 있었다. 경비실에 열쇠를 맡겨 두지도 않아서 엄마를 찾아야 했다. 그때는 전화도 없던 때라서 사택 마당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면서 어느 집에서 웃음소리가 나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이내 하하하 호호호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 그 집으로 갔더니 엄마가 계셨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문단>아침에 아버지가 출근하시고 나면 엄마는 항상 이웃집에 가셨고, 이웃 아주머니들도 <인명>장 씨 집에 자주 오셨다. 하루 종일 같이 몰려다니시면서 시장도 보고 부침개도 부쳐 먹었다. 엄마뿐 아니라 모두들 생활의 대부분을 사택 아주머니들과 같이했다. 엄마가 아주 친하게 지내는 집은 예닐곱 집 정도였는데, 그 집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 쌀독에 쌀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친한 집이 스무 집 정도 됐는데 숟가락 개수까진 몰라도 그 집안 사정을 대략은 알고 터놓고 지내는 정도였다. 어느 정도 친한 집은 서른 집 정도였는데, 서로 상례나 <항목연결 항목ID="GC80002592">혼례 등에 상부상조하는 정도의 친밀도였다. 사택에서는 교류의 폭이 굉장히 넓어서 일일이 인사를 하고 다니는 게 성가실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문단>사택 생활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1년에 한 번씩 사택 운동장에서 했던 체육 대회였다. 맛있는 것도 많았고 부모님들과 함께하는 경기도 재미있었다. 또 어린이날에는 회사로부터 선물도 굉장히 많이 받았다. 1994년 <기관 검색="1" 검색어="한국비료">한국비료가 <기관 검색="1" 검색어="삼성정밀">삼성정밀로 바뀔 때 정년 1년을 남겨 둔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시면서 사택에서 나와야 했는데, 그때는 정말 서운했다고 한다. <인명>장 씨는 지금도 친하게 지냈던 이웃과 마음껏 뛰놀던 넓은 공간들, 그리고 무엇보다 사택에서의 어린 시절이 그립다. 사택에서 살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친구들을 데려와 수세식 화장실을 보여 주며 뽐내기도 했다. <인명>장 씨는 그 당시 ‘사택 아이’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소표제 class="new">[울산 지역 사회와 사택] <문단> <지명>울산의 사택은 원활한 기업 운영을 위한 공간으로 존재했지만, 지역 입장에서 볼 때는 대단히 이질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사택 입주민 스스로가 놀라듯 시설부터 같은 시대의 다른 <지명>울산 지역과는 질적인 격차가 있었으며, 사택 구성원은 끈끈한 사택 공동체 속에 안주했지만 지역 사회와의 유대는 미약했다. 그나마 현장 노동자는 퇴직할 때까지 <지명>울산에서 생활했지만, 간부들은 승진과 전근 때면 <지명>서울을 비롯한 타 지역으로 떠났기 때문에 <지명>울산은 스쳐 지나가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힘들었다. <문단>이와 같은 사택 시설의 질과 수준은 개발 초창기에 모든 환경이 열악한 <지명>울산에 외지 인력을 정착시킴으로써 산업 단지를 조성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었다. 결과적으로 공장 가동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지명>울산 지역의 도시 공동체는 왜곡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이 있었다. 이 중 대기업이 소유하고 운영한 사택 공간은 <지명>울산 지역 사회에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측면도 있다. 사택의 높은 주거 수준은 어디까지나 특정 기업의 임직원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택 생활을 경험한 이들은 그렇기에 더욱 특별한 애착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참고문헌> <문헌> <저자>이도학, <서명 검색어="울산시 사택의 유형 분류와 계획 특성에 관한 연구">「울산시 사택의 유형분류와 계획특성에 관한 연구」(<출판사항>울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문헌> <저자>정미선, <서명 검색어="울산 남구지역 사택단지 형성과 변화연구">「울산 남구지역 사택단지 형성과 변화연구」(<출판사항>울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문헌> <저자>강혜경, <서명 검색어="근로자 이주사">「근로자 이주사」(<출판사항>『울산의 민속문화』, 국립민속박물관 외, 2017) <삽도 지정="0"><시청각 ID="GC800P00226" 확장자="jpg" 대표="1">효성 제2사택 전경<삽도 지정="0"><시청각 ID="GC800P03654" 확장자="jpg" 대표="1">현대자동차 사택 전경<삽도 지정="0"><시청각 ID="GC800P04637" 확장자="jpg" 대표="1">현대중공업 사택 전경<삽도 지정="0"><시청각 ID="GC800P09908" 확장자="jpg" 대표="1">태광산업 사택<삽도 지정="0"><시청각 ID="GC800P09909" 확장자="jpg" 대표="1">동부한농화학 제3비료공장 사택 전경 <삽도 지정="0"><시청각 ID="GC800P10515" 확장자="jpg" 대표="1">한국석유공업 사택 골목<삽도 지정="0"><시청각 ID="GC800P10516" 확장자="jpg" 대표="1">한국석유공업 사택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