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울산 지역 출신 정치인으로 제3공화국 박정희 정권 시기의 핵심 인물.
[가계]
본관은 학성(鶴城), 호는
우석(又石).
[활동 사항]
이후락(李厚洛)[1924~2009]은 1924년 2월 23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1943년 울산농업고등학교[현
울산공업고등학교]를 졸업[3회]하였다. 이후 울산을 떠나 다치아라이비행학교[大刀洗飛行學校]에서 6개월 교육을 받았으며, 1945년 광복 이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였다. 1955년 국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국학대학교가 1971년 고려대학교에 편입되어 고려대학교 동문이 되었다. 1946년 3월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1년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1954년 육군본부 병참감, 1957년 주미대사관 무관(武官), 1959년 국방부 기관장을 지냈다. 1961년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5.16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역임하였으며, 박정희 정권의 책사 역할을 하였다.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 동안 정부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1963년 대통령 비서실장, 1969년 10월 주일대사, 1970년 12월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72년에는 밀사로 북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비밀 회담 후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 냈다. 1973년 윤필용사건과 김대중납치사건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개입 의혹으로 해임되었다.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선거[울산시·울주군, 무소속]에 당선되었으나 신군부 등장 이후 1980년 국회 해산에 의해 의원직을 박탈당하였으며,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다.
이후락은 고향이자 박정희 정권 시기 추진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핵심 지역이던 울산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1964년 울산육영회를 설립하고 학성중고등학교,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
언양여자중학교[현
신언중학교], 우석고등학교[현
신정고등학교] 등 울산 지역에 다수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울산공과대학과 병설 울산공업전문대를 설립하고 1970년 2대 이사장에 취임하는 등 울산 지역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외에
울산문화방송의 전신인 울산민간방송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신군부의 등장 이후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자 울산육영회에서 설립한 학교들은 문교부에 의해 1982년 모두 공립화되었다.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지목된 이후에는 특별한 활동은 보이지 않으며, 2009년 10월 31일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상훈으로는 금성충무무공훈장, 청조근정훈장, 1등수교훈장, 2등보국훈장, 미국 동성훈장(銅星勳章)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