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울산 출신의 금융인이자 정치인.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아버지 오선익(吳益善)의 4남매 중 장남이자 외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오위영(吳緯泳)[1902~1978]은 1902년 5월 5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부산상업학교와 일본 고베고등상업학교[神戶高商]를 졸업하였다. 1921년 조선은행에 입행했고, 1928년 초계금융조합 이사, 1932년 진해금융조합 이사 등의 지역 금융조합 이사를 지냈다. 1935년 조선신탁주식회사에 들어가 군산지점 부지배인을 지내다가, 1946년 취체역(取締役, 이사), 1947년 두취[頭取, 은행장]를 지냈다. 금융인의 정점에 오른 이후 정계 인사들과의 접촉이 잦았다.
제헌국회의원선거 때 초계금융조합의 이사 시절 알고 지낸 김효석(金孝錫)[제헌의원, 제3대 내무부장관]이 정계 입문을 권고했으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88구락부의 멤버들과 접촉을 가졌으며, 1949년 2월 3일 정부조직법에 의해 조직된 중앙경제위원회의 재계측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제2대 국회의원선거 때 정식으로 정치에 입문했고, 울산 을구 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국회에서 무소속구락부로 활동하다가 원내 자유당 창당에 관여했으나,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면서 장면(張勉)을 차기 대통령으로 옹립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반감을 사게 되면서 다음 총선 출마 방해로 이어졌고,
제3대 국회의원선거 때 중도 사퇴하였다. 1955년 민주당 창당에 합류하여 민주당 중앙위원 및 경남도당 위원장을 지냈고, 다음 해에
김택천(金澤天),
최영근(崔泳謹)과 함께 민주당 울산군당을 결성해 고문을 지냈다.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부산 동구 을구 지역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경상남도 지역 선거구의 참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8년 10월 2일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창녕군 장마면에 있다.